《은조마네의 구구도생》 출간 기록 #1
닉 믈롱고의 장편소설 《Dog Eat Dog》 한국어판을 준비하며 남기는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출판사를 만들기까지
인문학을 전공하고 IT 엔지니어가 됐다
글을 쓰는 일에는 영 자신이 없었다. 누군가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창피하고, 항상 내가 쓴 글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유치하고 한심해 보였으니까. 그래도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 경험을 탐하는 마음은 커서 선배들이 끄적여 놓은 날적이나 복사 용지에 출력되어 돌아다니던 유인물들은 늘 끼고 살았다.
하지만 교지를 만드는 일은 달랐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편집회의와 세미나. 그냥 진지함으로 포장한 잡담이었다고 하자. 매번 끝나고 하는 뒤풀이 회식에서 더 많은 말들이 오고 갔으니까. 친목을 나누는 사교 활동이라고 하기에는 꽤 진지했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 아니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다 보면 선배고 후배고 없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진실인 것 같았으니…
일면식도 없던 사람에게 다짜고짜 찾아가 원고 청탁을 했다. 황당한 표정으로 어떻게 자기를 알고 왔는지 묻는 말에는 대충 얼버무리고,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선생님의 글을 우리 책에 올리고 싶다고 부탁하니 금세 표정이 풀렸다. 그때 알게 됐다. 책 만드는 사람은 글 쓰는 사람을 찾고, 글 쓰는 사람은 지면을 찾는구나. 그리고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직접 글을 쓸 필요는 없다.
그해 여름에는 문래동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인쇄에 쓰이는 필름을 들여다보았다. 교정쇄에 찍힌, 배경이 날아간 지면을 보면서 깨달았다. 책 만드는 일은 생각에 물성을 입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이런 일을 하면서 살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졸업하면서 IT 엔지니어가 됐다. 알겠지만, 인문학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일자리 찾기도 어렵고, 만족할 만한 돈을 벌기는 더더욱 어렵다. 게다가 사학을 전공했으니 기업에서는 아무도 반기지 않는 듯했다. 그때는 그랬다. 여러 해 코딩을 하면서 살았는데, 사람이 읽는 글쓰기는 그렇게 어렵더니 기계가 이해하는 글쓰기에는 소질이 있었다.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는 동료들과 아예 회사를 하나 차리기도 했으니, 남들 보기에는 그럭저럭 잘 풀린 셈이었다.
경력이 쌓인 개발자는 물건(프로그램)을 팔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책상에 앉아 메일을 쓰고, 파워포인트 문서를 작성하면서 누군가를 설득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려니 하던 일이 낯설게 느껴졌다. 앉은 자리도 어색하고 사람들도 나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때 알게 됐다. 나에게는 20년도 넘게 미뤄 둔 일이 있었구나. 회사를 그만두었다.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그렇게 오래 미뤄 둔 일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또 다른 일을 해 보겠다고 자격증 공부부터 시작했다. 공부는 재미있었지만 시험에 합격하는 건 다른 일이다.
1인 출판사를 만들다
종이에는 결이 있다. 횡목, 종목. 책을 만드는 데는 내가 모르던 규칙이 생각보다 많았다. 한겨레출판편집스쿨에 등록해서 이것저것 배웠다. 등록부터가 쉽지 않았다. 세 번 시도 끝에 겨우 등록. 이걸 배우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20대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그들보다 더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숙제하느라 밤도 새우고 발표도 하느라 7주는 금방 갔다. 이대로 수료하고 나가 혼자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선생님과 동기가 남았다. 선생님께는 항상 새로운 걸 묻는다. 첫 번째 직업으로 책 만드는 일을 택한 동기들은 지금도 일자리를 찾느라 고군분투 중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눈부신 친구들이 될거다.
출판사 만드는 건 쉽다. 출판사 신고, 사업자 등록, 세금 관련 업무. 방법은 인터넷에 나와 있고, 모두 앉은 자리에서 했다. 우리나라는 고도로 발전된 IT 사회다. 물류, 배본, 인쇄, ISBN 신청, 그리고 서점 계약. 안 해 본 일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문제는 첫 책이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주변에 작가가 없다. 아니 내가 만든 출판사에 기꺼이 원고를 주고 편집과 제작·유통을 맡겨 줄 좋은 작가가 없다. IT 기술이 있으니 AI로 번역을 돌리고, 최소 사양으로 찍어 내서 여기저기 입고해 볼 수 있겠다지만, 도저히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욕심을 부려 본다. 출판사의 정체성을 세우는 첫 책은 벽돌책이다. 전공을 살려서 고른 책은 《고양이 대학살》의 저자 로버트 단턴의 《The Revolutionary Temper: Paris, 1748-1789》였다. 에이전시에 문의를 넣었더니 웬걸, 판권을 줄 수 있다는 답이 왔다. 신이 나서 번역자를 찾아 나섰는데, 그렇게는 안 구해진다. 원서가 워낙 까다롭고 분량은 어마어마한 데다, 거기 들어 있는 사실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연구 성과를 따져 봐야 한다. 그게 편집자의 일이라고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직은.
어찌어찌 책이 나왔다고 해도 팔 자신이 없다. 하고 싶은 일 하겠다고 사람들이 사 보지도 않는 책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자기만족으로 하는 일이 아니니까. 시간은 간다. 앉아서 고민을 하고 성과는 없어도 시간은 간다. 게다가 혼자 하는 일과 고민은 외롭다.
무슨 책을 낼 건데? 누가 읽었으면 좋겠어? 어떤 생각을 전달하려고? 그래, 출판사는 어떻게 유지할 거지? 답을 찾는 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아니, 도와줄 수는 있어도 답을 대신 내려 줄 사람은 없다.
포부는 거창했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차별, 특정 세대 혹은 계층에게만 전가된 구조화된 가난과 모순. ‘그걸 드러내는 책을 낼 겁니다.’ 이제 보니 부끄럽다. 정작 손에 쥔 원고가 하나도 없으니…
다음에는 첫 책을 고르게 된 과정과 생각들을 정리합니다. 《은조마네의 구구도생》 출간 기록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