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드라마 연극
한국 연극·공연예술 담론의 지형을 바꾼 단 한 권의 책, 다시 돌아오다
2013년 한국어판이 출간된 이후 공연예술 연구자와 현장 실무자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던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오랜 절판 상태를 딛고 개정판으로 독자들을 다시 찾아갑니다.
독일의 연극학자 한스-티스 레만(Hans-Thies Lehmann)이 1999년 발표한 이 책은, 20세기 후반 이후 서구 연극 현장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지각 변동을 가장 영향력 있게 체계화한 기념비적 이론서입니다. ‘드라마 이후의 연극’이라는 개념을 통해, 더 이상 텍스트와 재현에 종속되지 않는 현대 공연예술의 새로운 문법을 규명한 이 저작은 출간 이후 20여 개 언어로 번역되며 전 세계 공연예술 담론의 공통 언어가 되었습니다.
절판된 고전, 그러나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텍스트
2013년 초판이 출간된 이후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국내 연극학계와 무용·퍼포먼스·미디어아트 현장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론서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초판 발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절판되면서, 지난 10여 년간 이 책은 구할 수 없지만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역설적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대학원 수업에서는 복사본이 돌았고, 중고 서적은 정가의 몇 배로 거래되었으며, 많은 연구자들이 원서를 직접 구해 읽어야 했습니다. 한 권의 이론서가 한국 공연예술계에서 이토록 오랜 시간 ‘부재의 존재감’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이 지닌 대체 불가능한 위상을 증명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극장 안팎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실험적 공연 형식의 이론적 좌표는 이 책 안에 있습니다. 레만이 제시한 분석 틀 없이 현대 공연예술을 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개정판에는 초판 이후 저자가 새로 덧붙인 대목과, 지난 10여 년간 축적된 국내외 후속 연구를 반영한 역자 해설이 함께 담겼습니다. 단순한 재출간이 아니라, 한국어판의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입니다.
나아가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연극 이론서인 동시에, 재현·신체·시간·공간·매체에 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을 담은 미학서이기도 합니다. 드라마라는 틀이 얼마나 오랫동안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왔는지, 그리고 그 자연스러움 아래에서 무엇이 가려져 왔는지를 이 책은 가장 먼저 묻습니다. 무용, 미술, 영화, 문학, 미디어 연구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이 저작은, 이지마스터가 앞으로 펴낼 진지한 인문·예술 이론서들이 딛고 설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책의 내용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1970년대 이후 유럽과 북미의 공연 현장에서 일어난 변화를 추적하며, ‘드라마적 연극’이 지배해 온 서구 연극 전통이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되어 왔는지를 분석합니다.
레만은 로버트 윌슨, 피나 바우쉬, 얀 파브르, 하이너 뮐러, 르네 폴레쉬, 포스트 엔터테인먼트(Forced Entertainment), 우스터 그룹 등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연출가와 극단의 작업을 폭넓게 참조하면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주요 특징들 — 텍스트의 탈중심화, 재현에서 현전으로의 이동, 신체성과 물질성의 전면화, 시간과 공간의 재구성, 관객의 역할 변화, 매체 혼합 — 을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이 책은 단순히 새로운 연극 사조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예술과 현실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현대 공연예술의 실제 사례를 통해 철학적으로 재검토하는, 하나의 미학적 선언이기도 합니다.
한스-티스 레만 (Hans-Thies Lehmann, 1944~2022)
독일의 연극학자.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게르만학·철학·비교문학을 수학하며 페터 손디(Peter Szondi) 문하에서 공부했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안제이 비르트(Andrzej Wirth)와 함께 기센 대학교 응용연극학과(Angewandte Theaterwissenschaft, 1982년 설립)의 초기 체계를 구축하는 데 참여했고, 1988년부터 2010년 퇴임까지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에서 연극학 교수로 재직했다. 이 두 학맥에서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 쉬쉬팝(She She Pop), 고브 스쿼드(Gob Squad), 르네 폴레쉬(René Pollesch) 등 오늘날 세계 공연계를 이끄는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배출되었다.
1999년 출간한 《포스트드라마 연극(Postdramatisches Theater)》은 현대 공연예술 이론의 표준 텍스트가 되었다. 이 외에도 《비극과 연극(Tragödie und dramatisches Theater)》(2013)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그리스 비극에서 현대 퍼포먼스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연극 철학을 구축했다. 2022년 아테네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는 현대 연극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김기란
연극평론가이자 공연예술 연구자.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서 한국연극 및 희곡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현대 연극 이론과 한국 근현대 연극사를 두 축으로 오랜 시간 연구와 비평 활동을 이어 왔으며, 공연예술의 이론적 토대와 현장의 실천을 잇는 작업에 꾸준히 힘써 왔다.
2013년 《포스트드라마 연극》 초판 번역을 통해 한스-티스 레만의 이론을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소개했으며, 이 번역 작업은 이후 한국 공연예술 담론의 지형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저서로 《극장국가 대한제국》, 《비주류들의 말하기》 등이 있다.
이번 개정판 작업에서 번역자는 초판 출간 이후 10여 년간 축적된 국내외 연구 성과와 독자들의 피드백을 반영해 용어의 정비와 함께 새로운 역자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단순히 책을 다시 찍어내는 작업이 아닌, 한국어로 된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결정판이 필요하다는 현장의 오랜 숙원이 담긴 개정판이다.